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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탁자의 의무
fiduciary responsibilities 라는 생경한 제목을 단 글이 제리 포넬의 혼돈의 장원 에 올라왔다. 원문은 번거로운 등록절차를 필요로 하는데, 대목을 짧게 옮겨본다.


애플이 아이팟에 파이어와이어 케이블을 넣지 않는 까닭으로 내가 '신탁 사유'라는 용어를 쓰자 한 동료가 물었다. 설명을 해야할듯.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고 위험을 없애려는 성급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는 기업 이사들의 권한을 계속해서 제한하고 있다. 주주의 소송을 수월하게 했고, 주가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대해서는 이사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수탁자의 의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기업의 이사와 간부들은 주주의 위임을 받는 만큼 그에 따라 특별한 의무를 져야하지 않겠는가 하고.

그리하여 이사들은 단기 수익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거기에다 흔히 보는 스톡 옵션을 더하면 주가에 대한 압박은 더 높아진다. 장기적인 성장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그다지 큰 문제는. 지출을 줄이고 이번 4분기의 수익률을 과시하는 것이 새로운 목표가 된다. 물론 수익률 성장으로 받는 커다란 보너스는 반납하지 않는다, 단기적인 최적화가 장기적인 파국을 가져오더라도.

한 시나리오를 가정해 보자: 떠오르는 새 CEO가 있다. 그는 연구부서를 폐쇄하고 지출을 절감한다. 판매에 돈을 좀 쏟고, 매출이 오르면 마케팅 직원들을 줄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술 지원, 유지 보수, 품질 관리 차례대로. 지출은 훨씬 줄어든다. 매출이 좋아보인다. 수익률이 오르고, 주가가 뛴다. 넋이 나간 주주들의 만장일치로 커다란 보너스를 받는다. 잘난 이 사람은 다른 회사의 제의를 망설이다 못이기는 척 수락하고, '이 곳에서의 내 일은 끝났소'라는 주제의 인사와 함께 떠난다. 시간이 지나고 회사가 흔들린다. 고객은 더 이상 브랜드를 믿지 않고, 마케팅이 없어졌으니 매출도 떨어지며, 새로운 제품은 더 이상 없다. 주식이 곤두박질한다. 모두가 불행해진다, '내가 떠날때는 주가가 높았죠. 새 경영진 아래 일어난 일을 어쩌겠어요'라는 잘난 친구 마저.

실제 시나리오 하나: 톰 클랜시라는 보험 판매원은 해군 장교들과 친구였다, '이렇게 근사한 일을 하는 걸 누군가 알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붉은 시월을 찾아서'라는 책을 썼다. 미 해군, 미 해군 사관 학교와 연관된 비영리 기관인 미 해군 연구소에서 책을 펴냈다. 그들로서는 첫 소설이었다. 예상치 않게 대성공을 거두고, 클랜시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미 해군 연구소는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던 일에서 예상하지 않은 큰 수익을 얻었다. 클랜시는 곧 주류 출판사의 제의를 받고, 두툼한 계약금에 서명했다. 모두 축하드립니다. 잘 했네, 행운을 비네.

변호사들이 등장한다. 미 해군 연구소 이사회에 톰 클랜시의 인물들과 미래의 수익에 대한 소송을 건의한다. 이사회는 대략 "그래서요? 윤리적으로 요구할 것이 없잖소? 책을 펴냈고, 돈을 벌었소. 우리는 만족해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당신은 수탁자의 의무가 있으므로 합법적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만큼 벌어야 합니다. 클랜시를 기소해야 합니다. 아마도 그는 대결보다는 합의를 할겁니다. 미 해군 연구소의 몫을 요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후로 지저분하게 전개되었다. 몇몇 미 해군 장교들이 '비윤리적인 갈취'에 동참할 수 없다며 전역했다. 마침내 사건은 마무리 되었지만, 자세한 내역은 공개되지 않았다.

'수탁'이라는 낱말을 쓴데는 신중한 이유가 있다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풍자인지 진지한 얘기인지 밝힐 의무는 없다고 본다. 날카로운 독자들은 구글 對 마이크로소프트의 그럴듯 한 전쟁에도 들어맞는 점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리라.
by ethar | 2005/11/01 11:49 | 그리고 / etc. | 트랙백 | 핑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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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뽑기’식? 금산분리 완화-국책은행 민영화 ‘속도전’ 주문 산업은행 내년에 매각…전광우 금융위장 “지주사 전환 연내 마무리” 아참, 언제부터인가 이글루의 예전 글은 구글에서는 찾기 어렵다. 네이버나 다음에서는 나오는 모양인데, 역시 주인이 바뀐 결과인가. 그리하여 이사들은 단기 수익을 최대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거기에다 ... more

Commented by ihong at 2005/11/02 11:31
이렇게 주주자본주의에 내포된 근본적인 주인-대리인 문제를 저런 식으로 풀어놓는 일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얼핏 들으면 주주자본주의라는 시장에 참가하는 주체들이 "또라이"라는 말처럼 들리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사장으로 취임해서 저렇게 단기적인 성과에 집중한 뒤 가시적인 실적을 살짝 보여주고 그 댓가로 엄청난 보너스를 받은 뒤 빠지는 먹튀형 사장이 하나 둘 생긴다면 주주들이 그걸 알면서도 그대로 놓아두겠습니까?
Commented by ihong at 2005/11/02 11:33
문제는 이렇게 주인-대리인 관계에서 성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거나 관찰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이 따르며 이를 명확하게 계약에 집어넣는 일은 더욱 어렵다는데에서 나오죠.

그런데 저런 식으로 쓴 글을 읽다보면 마치 치고 빠지기 잘하는 사장의 농간에 주주자본주의 세력 전체가 농간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Commented by ihong at 2005/11/02 11:35
차라리 투기적 자본세력이 소수에게 집중되어 있고 이들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특정 산업부문을 옮겨다니며 단기적인 매매차익을 실현하는데 열심이고 그 과정에서 전통적인 정치세력과 이에 빌붙어 먹고사는 관리자 및 금융가들이 암묵적인 음모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훨씬 현실에 가깝고 또 설득력이 있습니다.
Commented by ihong at 2005/11/02 11:37
하지만 위 글을 쓴 사람처럼 뭔가 포지티브한 이론으로 현실을 비판하고 설명하려면 그 이론이 태클을 거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파헤쳐야겠죠. 먹튀 경영진과 또라이 주주들이 아니라 "계약문제" 및 "성과증명 및 파악 문제"로 말이죠.

한 가지 덧붙이자면, 경제학 등에서 이론적으로 수십 년 동안 붙들고 늘어졌지만 이론적으로 쌈빡하게 저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거의 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드는 생각은 오히려 정치경제학적으로 사태를 읽고 또 그에 준하는 대책을 내놓는 (이데올로기적인가?)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
Commented by ethar at 2005/11/02 16:43
^^ '암묵적인 음모'가 와닿는 해석입니다.
글을 옮긴 것은 실리콘밸리에 만연한 한탕주의, 금전만능주의와 좀 닿은 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재빨리 눈에 띄고 사다리 건너뛰는게 자주 보이거든요. 물론, 실력이 없이는 오래 가기 어렵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그런 포부(?)를 공공연히 드러내곤 합니다. (-ㅅ-)
제리 포넬이야 자타가 공인하는 libertarian 아닙니까. 모르는척 시치미떼고 논리를 전개하는게 특기가 아닌가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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